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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 통신원 [email protected] 입력 2023.09.01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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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영의 ‘헬라어로 읽는 에베소서 특징’ (6)
이번에는 헬라어로 에베소서 4장을 읽을 때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알아본다.

에베소서 4장을 들어가면 이제 어떠한 부가적인 말은 멈추고,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헬라어로 에베소서 4장을 읽을 때 보이는 몇 가지 특징을 간단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에베소서는 ‘꼬리 잇기’를 참 잘하는 것 같습니다. 각 장이 앞 장의 내용을 이어 확장하는데 2장이 1장을, 3장이 2장을, 그리고 이제 4장도 앞의 장을 잇습니다. 바울은 1~3장의 내용을 토대로 4~6장에서 삶에 적용할 지침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4장만 해도 1~3장과의 연계성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 소망, 평안,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 기업을 얻게 하심,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충만케 하심, 하나됨, 성령의 인치심 등 이론적으로 논해 졌던 내용이 실제적 적용을 위해 재등장합니다. 


2. 4장1절은 이 한 구절 내에서 이러한 연결성과 실제적 행동에 대한 촉구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라고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부르심’을 재차 언급하면서 이전에 언급했던 부르심의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어떤 한역본에서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부르심’을 한 번 언급하지만, 원문에 따르면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이라고 두 번에 걸쳐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편, 헬라어는 문장 내에 단어의 위치를 한국어보다 더 자유롭게 배치하면서 강조점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 방법으로 ‘합당하게(악시오스, ἀχίως)’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전 장들에서 ‘부르심’에 관해 설명했다면, 이번 장에서는 그에 ‘합당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구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은 이전에 논해졌던 내용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그에 대한 실제적 적용을 강조하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꼬리 잇기’는 구절 간에서도 나타납니다. 언뜻 보면 뚝뚝 끊어져 있는 것 같은 구절들이 사실상은 끝나지 않은 한 문장 안에 속하거나, 이미 언급된 내용에 대한 부연 설명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헬라어에서 관계대명사, 전치사 등 여러 방법으로 문장을 잇거나, 문장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라는 1절의 말씀은 2~3절에서 구체화됩니다. 역본에서는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며 자체적으로 ‘하다’라는 동사를 넣지만, 사실상은 4장1절에서 ‘행하라(직역으로는 ‘걸으라’)’와 연결되는 전치사 구문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겸손과 온유로 걸으라”라고 번역될 수 있지요. 그 뒤의 구절에서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방법으로,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화합을 힘써서 지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같이 2~3절이 1절에 종속되고 있는 한편, 4~6절은 3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화합’에 대해 부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4~6절에는 주동사가 따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인 삼위 하나님과 및 하나인 다른 것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서 “너희가 너희의 기업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것과 같이”가 삽입된 것을 빼고 본다면 4~6절 초반은 ‘한 몸, 한 영, 한 주,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 곧 모두의 아버지’라고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한 성령, 5절은 한 주님, 6절은 한 성부 하나님을 언급해 여기서도 삼위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지요.


7~10절 4~6절에서 하나라고 언급된 것/분들에 관해 확장해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런 꼬리 잇기 방식은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계속됩니다. 이처럼 비록 한역본에서 각기 독립적인 문장들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언어 혹은 개념이 재연되는 방식을 집중해 보신다면 전체적인 문맥의 연결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위의 내용을 고려하면, 11~14절도 한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역본과 달리 12절에서 문장이 끝나지 않고,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13절로 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아니라, 13절에서 언급하는 온전하며 충만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역본을 보면서 헷갈릴 수 있지만, 12절에 나오는 “온전케”라는 말은 13절에서 “온전”과는 다른 원어를 사용합니다. 12절에 사용된 온전함 (카타르시느몬, καταρτισμὸν)은 어느 정도 준비됨, 혹은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면, 13절에서 ‘온전한 사람’ 이라고 할 때 사용된 텔레이온 (τέλειον)은 ‘어느 기준점의 끝까지에 이른 온전함’을 뜻합니다. 


여기에 더해 13절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세워지는 것뿐 아니라, 성도들 지식과 믿음을 공유하며 모두가 함께 성숙하는 것을 참된 온전함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온전해지는 그리스도의 몸된 개인과 교회는 14절에서 언급하듯 어린이같이 사람의 말에 쉽게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언급할 내용도 11~14절과 동떨어진 내용이 아닙니다. 15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고 하는데, 여기서 “참된 것을 하여”는 원어상 하나의 단어입니다. 이는 ‘진리’로 번역되는 알레떼이아(ἀλήθεια)와 동일 어근에서 파생된 알레뚜오(ἀληθεύω)라는 동사인데, 이 구절에서 ‘진리를 행하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성경 내에서 유일하게 한 번 더 사용된 갈라디아서 4장16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번역했을 뿐 아니라, 성경 외 책들에서도 진리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에서 진리를 알고, 말하며, 가르치는 것이 강조되는 문맥을 볼 때 (13~14, 2, 24~25 등) 대부분의 영역본에서 그러하듯 이 단어가 4장15절에서 ‘진리를 말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하는 말은 어쩌면 4장에서 말하는 하나됨의 속성을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연합의 기초를 세우지만,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악과 악인에 대하여 교정하지 않는 것은 참된 연합이 될 수 없습니다. 참이 무엇이며 거짓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면서, 서로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바로잡아 주는 것이 바른 연합으로 가는 길이지요.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연합은 자석이 아닌 나침반과 같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뭉쳐지는 것이 아닌, 각자가 나침반처럼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향하게 될 때, 우리는 세대와 지역을 넘어 하나님 안에 참된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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